‘밥’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쓰임새가 다양하다. 빵을 먹건 라면을 먹건 한국 사람들은 “밥 먹었다.”라고 하며, 영 눈살이 찌푸려지는 일을 접하면 ‘밥맛’이 없다고 한다. ‘밥 먹고 살 정도’라는 건 웬만큼 돈을 번다는 뜻이며 ‘밥숟갈 놨다.’는 말은 세상을 떠났다는 의미다. 식탁은 곧 ‘밥상’이며 “언제 밥 한 번 먹자.”라는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쓰는 거짓말(?) 중의 하나다. 무슨 일이든 “밥 먹고 합시다!”의 제물이 되기 일쑤고 일을 못하면 ‘밥값은 해라’는 핀잔이 날아든다. 그렇게 밥은 한국 사람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이 밥은 곧 쌀이었다. 물론 다른 곡식으로 먹는 밥도 밥이지만 하얗게 고봉으로 쌓아올린 ‘쌀밥’이 진정한(?) 밥이었다. 그러나 원래 벼는 열대성 작물,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 기후 상 벼농사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쌀은 항상 귀했고 모자랐고 아쉬웠다. 좀 엇나가 본다면 북한이 ‘이밥’ 즉 쌀밥에다가 고깃국 먹는 것을 수십 년 동안 일종의 로망으로 삼아 왔던 점이나 “쌀은 공산주의”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이유 역시 ‘쌀 부족증’의 단면일 것이다.
북한에 비해서는 기후나 환경이 나았던 남한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해방 직후 일어났던 대구 10.1 봉기의 이유에는 미 군정의 쌀 배급 실패로 시중에 쌀이 크게 모자랐던 상황이 자리 잡고 있다. 쌀값이 근 열 배나 올랐다고 하니 어지간한 사람들이 ‘밥’ 구경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역대 정권에게 ‘쌀값’이란 초미의 관심사이자 골칫거리였다. 쌀이 모자라자 전국의 중국집에 ‘쌀밥 사용 금지령’이 내려 잡채밥과 볶음밥이 사라지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고 흰쌀밥으로만 도시락을 싸왔다가 ‘혼식’ 즉 보리나 콩을 섞지 않았다는 이유로 두들겨 맞는 어처구니없는 일상도 존재했다.
쌀을 풍족하게 생산할 수는 없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야말로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짜내고 땀을 흘리고 불을 밝혔다. 그 가운데에는 의문의 실종으로 생을 마감한 중앙정부장 김형욱도 있었다. 그 휘하의 중앙 정보부는 이집트에서 생산되던 고수확 품종이었던 ‘나다’를 훔쳐내 가져왔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도 감격하여 “보릿고개를 넘길 효자”라고 자랑하여 여기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희농(熙農)이라 명명했고 김형욱 정보부장은 자신이 현대의 문익점이라고 자랑하고 다녔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이집트에서는 몰라도 한국의 토양과 환경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남이건 북이건 일촉즉발의 분위기로 지새던 냉전 시대, ‘식량 자급’은 경제의 문제를 넘어 안보의 문제였고 많은 사람들이 다품종 벼 생산에 매달리고 있었다. 허문회 서울대 교수는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IRRI)로 날아가 벼와 씨름했다. 벼에는 옛날 사람들의 기억으로는 ‘안남미’, 젊은 세대의 감각으로는 쌀국수를 주로 만드는 품종인 ‘인디카’와 동북아시아 사람들이 즐겨 먹는 ‘자포니카’의 두 품종이 있었다.
허문회 교수는 인디카의 경우 한국 환경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보고 인디카와 자포니카를 교배시키는 쪽으로 연구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교배시키는 자체도 어려운 데다 종간 거리가 먼 두 종간의 교배로 태어난 잡종벼들은 불임이었다. 호랑이와 사자의 혼혈은 가능하나 그 사이의 ‘라이거’가 불임인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하지만 허문회 교수는 수백 개의 잡종 조합을 만들었고 그것들을 일일이 교배시키며 불임에 해당하지 않는 조합을 찾아냈다. 최적의 조합은 내랭성(耐冷性, 냉온에 견디는 성질)이 좋은 인디카종 TN1과 한국의 자포니카종을 원연 교잡하여 만든 인디카 교잡종 IR8과 일본의 유카리를 ‘삼원 교잡’하여 다수확 품종 ‘IR667’을 탄생시킨다. 바로 통일벼의 탄생이었다.
이집트에서 훔쳐온 ‘나다’의 실패 이후 절치부심하던 박정희 대통령은 즉시 IR667의 시험 재배를 지시했다. 3년간의 시험 재배가 이어졌다. 그동안 아찔했던 사건도 많았다. IR667을 심고 논에서 살다시피 한 농촌진흥청 홍성호 연구사의 회고다.
“(호우가 오던 날) 어디선가 큰 구멍으로 물이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둑이 터지는 날에는 IRRI에서 보내온 벼들이 싹 쓸려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구멍을 막을 수 있는 것이 눈에 띄지 않았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우선 쥐고 있던 우산을 편 채 물이 빨려 들어가는 구멍에 쑤셔 박고는 다시 찬찬히 주위를 둘러봤다. 인부들이 쓰던 가마니 조각이 보였다. 그걸 가져다 우산 위에 덮고 주위 흙을 힘닿는 대로 손으로 긁어 얹었다.” (2008.6.26 조선일보 논픽션 대상 <배고픔을 잊게 해 준 통일벼가 나를 세 번 울리고 세 번 웃겼어>
그렇게 3년의 시험 재배 후 통일벼가 다수확품종임은 확인됐지만 문제가 있었다. ‘밥맛이 없었던’ 것이다. 맛도 없고 식으면 푸석푸석해졌다. 1971년 2월 5일 운명의(?) 통일벼 시식회가 열렸다. 소심해질 수밖에 없던 농업 진흥청장은 “무기명으로 적으시면 됩니다.”라면서 IR667로 만든 밥과 평가표를 내밀었는데 웬걸, 박정희 대통령은 평가표에 색깔 좋음, 차진 정도 보통, 밥맛 좋음이라는 A*급의 평가를 내린 뒤 거기에 떡 하니 자신의 이름까지 적어 놓았다. 박정희. 어디 밥맛없다고 할 테면 해 보라는 위엄(?)이었다고나 할까.
그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누가 이걸 맛없다고 그래. 비싼 돈 주고 외국 쌀 사 먹는 처지에 밥맛 따지게 됐어?” 누군가 “통일벼는 일반 벼보다 키가 작아 지붕 이엉을 엮는데 나쁘다.”라고 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되받아쳤다. “지붕을 개량하면 되지 무슨 소리냐?” (중앙일보 1997.9.11- 실록 박정희 시대:18) 새마을 노래 가사인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 길도 넓히고’의 영감이 혹시 통일벼에서 나온 건 아니었을까. 1972년부터 ‘통일벼’ (IR667의 공모명)는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지만 고수확이라는 장점만큼이나 약점도 지대했다. 우선 재배 방법이 까다로웠고 교배 품종의 특성상 병충해에 유달리 취약했던 것이다. 거기다 밥맛이 없어 시장성도 떨어지니 농민들이 통일벼를 꺼리는 것도 당연했다. 공무원들은 못자리를 짓밟아가며 통일벼 재배를 강권하고 통일벼의 효능을 홍보한 결과는 일단 만족스러웠다. “1973년 가을 통일벼의 단위 면적당 생산량은 자포니카에 비해 37퍼센트나 높았다...... 1974년부터 1977년까지 쌀 생산량도 개별 농가의 명목소득도 모두 크게 증가했다. 통일벼는 맛이 없어 시장에서의 경쟁력은 떨어졌지만, 정부는 추곡수매와 이중곡가제를 통하여 통일벼 재배 농가에 확실한 인센티브를 부여했다.” (한겨레신문 2002.7.13.)
1977년 통일벼는 그 절정기를 맞았다. 4천만 석 생산을 돌파하며 단위 면적당 세계 최고의 쌀 생산량을 기록한 것이다. 통일벼에 이은 품종 개량 벼들은 참담하게 실패한 경우가 많았고 통일벼 자체도 80년대 이후 쇠락하여 1991년 말 1992년부터의 통일벼 추곡수매를 중단함으로써 통일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 의미는 결코 적지 않다. 한국어에서 ‘보릿고개’라는 단어가 사라지게 만든 일등공신이며 최소한 우리 민족의 주곡인 쌀만큼은 자급자족할 수 있다는 든든함의 원천이었으며 2009년 교육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이 공동으로 선정한 '국가연구개발 반세기의 10대 성과 사례'에 남을 만큼 치열하고 진지한 연구와 개발,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빚어낸 성과였던 것이다.
* 본 칼럼은 수정 없이 게재하며 농림축산식품부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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