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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농업 자료(~2021)/[농업 정책] 기사

테이스티 인문학 1. 우리밀이 맛있을 때가 있다

by 청년농사꾼 2016. 7. 20.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이 1991년부터 있었다. 그 무렵에 나도 이 운동에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우리 농촌을, 농업을, 농민을 살려야 한다는 의무감이 작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때에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이 일에 동참하였다. 그런데 현재의 결과를 보면, 운동만 있었지 우리 밀을 살려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 밀 살리기 운동’ 시작 / 출처 : 우리밀 살리기 운동본부 www.woorimil.or.kr>



그때에 열심히 운동하는 분들 앞에서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였는데, 속으로 나는 늘 이런 소리를 내곤 하였다. “우리밀이 살았던 적이 있어야 살리지….” 한반도에서의 밀 재배 역사를 슬쩍 숨기고 있는 운동 이름인 까닭이었다.     

 

한반도에서 밀은 귀하였다. 밀 재배에 어려움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밀 재배 시기를 두고 경합을 벌인 작물은 보리인데, 밥을 주식으로 하는 입식(粒食) 문화가 정착을 하면서 쌀과 비슷한 조리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 보리를 선택하였다. 또 보리가 밀보다 10여 일 이르게 수확할 수 있다는 점도 밀을 포기하게 만든 요소이다. 그 농지에 이어서 벼를 심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밀은 한반도에서 제대로 살았던 적도 없으니, 이 운동이 실패하여도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 그러면 안 된다. 우리 스스로 원하였던 바는 아니나 분식의 시대가 열렸으니 보리보다 밀을 더 많이 재배하는 것이 농민이나 소비자에게 유리할 수 있다. 우리밀이 수입 밀에 비해 가격이 다소 높다 하여도 소비자들이 우리 밀을 찾을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이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의 시발 동력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 무렵에 나는 수시로 우리밀의 국수를 먹고 만두를 먹고 빵을 먹곤 하였다. 그 횟수가 잦아질수록 이 운동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맛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밀 품종은 대부분 금강밀이다. 이를 경질밀이라 하나 유럽이나 북미 지역에서 키우는 경질밀에 비해 경질도가 많이 떨어진다. 또, 토종 앉은뱅이 밀은 연질밀이다. 이 우리밀로 요리한 국수며 만두는 힘이 없다. 빵을 하여도 잘 부풀어 오르지도 않고 푸석하다. 그렇게 하여, 열심히 운동하는 분들 앞에서 대놓고 하지 못하는 말이 하나 더 생기게 되었다. “맛이 있어야 우리 밀을 살리자 하지….” 이후 10여 년 동안 우리밀이 죽어도 어찌하겠어하는 방관의 자세를 취하였다.


어느 해에 산지를 돌아다니며 제철의 우리 농산물을 알리는 방송에 출연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6월 말 또는 7월 초였을 것이다. 제작진이 우리 밀을 촬영하자고 하였다. 나는 툴툴거리며 이렇게 일러두었다. “그게 의미는 있어도 맛은 없어.” 그렇게 전남 구례로 촬영을 가게 되었다. 이 지역이 우리밀 재배를 제법 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우리밀로 한 빵을 먹고 국수도 먹었다. 놀랍게도 맛있었다. 내가 이때까지 먹어왔던 우리밀의 음식이 아니었다. 신선한 곡물의 향이 온몸에 가득 퍼졌다. 그간에 품종이 바뀌었나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어떤 조건이 달랐던 것인데, 그 자리에서 이를 따지고 또 따지고 들었다. 같이 촬영을 하였던 요리사가 내게 이 말을 툭 던졌다. “그 밀은요, 수확한 지가 며칠밖에 안 되었고, 도정은 어제 했지요. 그러니….” 머릿속이 번쩍하였다. “아, 이건 햇밀이다!!!”







그해에 갓 거둔 쌀을 햅쌀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 햅쌀은 산지와 품종이 어떻든 무조건 맛있다. 콩도 그렇다. 늦가을 타작하고 나서 그 콩으로 처음 쑤는 두부의 맛은 정말이지 예술이다. 보리도 그렇고, 수수도 그렇고, 메밀도 그렇고, 곡식은 햇것이 무조건 맛있다. 밀가루 음식을 그렇게 많이 먹으면서도 그 밀이 햇것인지 묵은 것인지 따져볼 생각을 왜 하지 않았던 것인지 내가 참 바보 같기만 하였다.


구례에서 돌아와 당장에 수입 밀가루 제품의 봉지를 살폈다. 예상했던 대로 수확 연도가 적혀 있지 않았다. 수입 밀은 햇밀이니 묵은 밀이니 따지고 자시고 할 것이 없었다. 그러면, 우리 밀을 살릴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다. ‘햇밀 시즌’을 만드는 것이다.







여름이면 너도나도 냉면이며 막국수를 찾는다. 사실, 이건 맛으로 보면 엉뚱한 일이다. 메밀은 가을에 거두고 겨우내 먹는 곡식이다. 일본도 메밀국수, 즉 소바를 먹는데, 이들은 가을이면 가게 앞에 ‘햇메밀 입하’라고 써서 소바철이 왔음을 알린다. 일본에 “메밀은 여름에는 개도 안 먹는다”라는 말도 있다. 


그러면, 여름은? 맞다. 밀국수의 철이다. 여름 밀은 햇밀이니 여름에 밀국수를 먹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저기 국수집에서 ‘우리 햇밀 입하’라고 써 붙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가자. 제과점도 ‘우리 햇밀 입하’를 내걸 수도 있다. 만두점도 짜장면집도 우동집도 그러면 될 것이다. 햇밀에 대한 관념만 새로이 만들면 우리 밀은 시장에서 크게 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밀 자급률이 겨우 1%이다. 우리 밀 생산량이, 1년 365일 중에 3일 하고 반나절 온 국민이 먹으면 없앨 수 있는 양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햇밀 시즌’을 길게 잡을 것도 없다. 딱 30일만 잡아도 된다. 이 햇밀 시즌에 다 같이 우리 땅의 햇밀을 먹어 치우고 그다음에는 언제 수확했는지 알 길이 없는 수입 밀 먹으면 된다.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이라는 이름에는 ‘애국 애족 애농’ 마케팅 정신이 담겨 있다. 자본주의 사회 소비자에게 이런 마케팅은 큰 효과를 얻기 어렵다. 음식은 맛있으면 알아서 찾게 되어 있다. 굳이 운동을 하겠다면 ‘햇밀 먹기 운동’이 적절할 것이다.






* 본 칼럼은 수정 없이 게재하며 농림축산식품부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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