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공주에서 무령왕릉이 발견됐다. 무덤의 임자를 밝히는 지석까지 보존된 삼국시대 왕릉이란 가히 한국판 ‘투탄카멘의 묘 발견’이라 일컬어질 만큼 놀랍고도 진귀한 일이었지만 무령왕릉 발굴은 단 3일 만에 무덤 안을 깡그리 비우는 졸속 발굴로 이어졌고 이는 한국 고고학계의 트라우마로 남는다. 1973년 경주의 황남대총에 대한 발굴이 시도됐으나 무령왕릉 발굴의 악몽이 고고학자들의 발길을 더디게 만들었다.
<무령왕릉 / 출처 : wikimedia>
일단 황남대총을 본격적으로 파헤치기 전 그 근처의 좀 규모가 작은 제 155호 고분을 ‘연습 삼아’ 발굴하기로 했는데 이 ‘연습’은 실전보다 더 화려한 연습으로 역사에 남게 된다. 가장 온전한 형태의 신라 금관과 천마(天馬)가 그려진 장니(말 안장에 진흙이 튀지 않도록 드리우던 덮개) 등 1만점이 넘는 부장품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 가운데 특이한 부장품이 끼어 있었다. 목관 옆에 있던 그릇 안에서 완전한 형태의 계란 2개와 계란 껍질들이 발견된 것이다. 계란 껍질이 썩지 않고 고분 안에서 발견된 예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고 한다.
<천마총 / 출처 : wikimedia>
천마총에는 지석이 발견되지 않아 누구의 무덤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6세기 중엽 지증왕이나 소지마립간이 그 주인으로 추정되는데 분명한 것은 당시 사람들이 계란을 먹었으며 왕의 무덤의 부장품으로 선택될 만큼 특별한 음식이었다는 사실이겠다. 하기야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태어난 숲에서 닭이 울었다 하여 계림(鷄林)이라 했고 신라를 일컫는 말로까지 쓰였으니 닭과 뗄 수 없는 계란은 당연히 신라 사람들에게 친숙했을 것이다. 하지만 계란을 어떻게 먹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계란에 대한 요리법은 조선 시대에야 등장하는 것이다. <음식다미방>이나 <주방문>같은 문헌에는 오늘날로 치면 계란찜이나 삶은 계란, 계란탕 등 다양한 요리가 나타난다.
‘계란유골’(鷄卵有骨)이라는 말이 있다. 계란에도 뼈가 있다는 것은 운 나쁜 사람은 쉬운 일에도 낭패를 보는 상황을 의미하는데 여기에는 황희 정승의 전설이 얽혀 있다. 청백리로 유명했던 황희의 살림살이를 걱정한 세종이 어느 날 영을 내린다. “내일 아침 남대문을 열어서 닫을 때까지 문 안으로 들어오는 물건을 다 사서 황희에게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비바람이 몰아쳐 남대문에 인적이 끊겼고 저녁나절이 돼서야 한 촌로가 계란 꾸러미를 들고 남대문에 나타났다 임금은 이를 사서 황희에게 보냈고 황희 역시 성은에 망극해 하며 계란을 깨 보니 모두 골아 있었다. 이 ‘골어 버린’ 계란에 뼈 골(骨) 자를 써서 황희정승의 처지를 ‘계란유골’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이렇듯 조선 시대 내내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도 계란은 무척 귀한 식품이었다. 계란은 우유와 더불어 완전식품의 하나로 일컫거니와 고기가 귀하던 시절 계란은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고 볏짚으로 만든 계란 꾸러미는 오늘날의 ‘한우갈비세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값진 선물 노릇을 했다. 주요한의 소설 <사랑 손님과 어머니>에서 주인공 옥희와 한 집에 살게 된 ‘손님’에게 좋아하는 음식을 물었을 때 손님은 ‘삶은 계란’이라고 대답한다. 자신도 삶을 계란을 좋아했던 옥희는 신이 나서 어머니에게 달려가 손님이 삶은 계란을 좋아한다고 외친다. 이후의 소설 원문을 옮겨 본다. 계란 속 노른자의 출렁임 같은 애틋한 감정의 움직임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엄마, 엄마, 사랑 아저씨두 나처럼 삶은 달걀을 제일 좋아한대.” 하고, 소리를 질렀지요. “떠들지 말어.”하고, 어머니는 눈을 흘기십니다. 그러나 사랑 아저씨가 달걀을 좋아하는 것이 내게는 썩 좋게 되었어요. 그것은 그 다음부터는 어머니가 달걀을 많이씩 사게 되었으니까요. 달걀 장수 노파가 오면, 한꺼번에 열 알도 사고 스무 알도 사고, 그래선 두고두고 삶아서 아저씨 상에도 놓고, 또 으레 나도 한 알씩 주고 그래요. 그뿐만 아니라 아저씨한테 놀러 나가면, 가끔 아저씨가 책상 서랍 속에서 달걀을 한두 알 꺼내서 먹으라고 주지요. 그래, 그 담부터는 나는 아주 실컷 달걀을 많이 먹었어요.”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은 한국과 일본의 대결로 치러졌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 대표팀이 한국 땅을 밟을 수 없다고 선언했고 한국 축구팀은 홈 앤 어웨이를 포기하고 적지에 가서 경기를 치러야 했다. 해방된 지 10년도 안됐을 무렵, 분위기는 매우 살벌(?)했다. “만약 진다면 다 현해탄에 빠져 죽어라.”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어느 날 밤 한국 축구팀 숙소였던 영등포 동아여관에 웬 할머니가 찾아온다. “일본을 꼭 이겨 주시오.”라고 두 번 세 번 다짐하면서 그녀가 내놓은 것은 계란꾸러미 다섯 개였다. 아마 그 계란을 먹은 선수들은 질래야 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일본을 꺾고 스위스 월드컵본선에 진출하게 된다. 이후로도 계란은 오래도록 ‘귀한 음식’의 아우라를 보유하고 있었다. 70년대만 해도 계란 프라이가 도시락에 얹혀진 날은 운이 좋은 날이었고 계란말이 정도면 반 아이들이 모두 탐내는 반찬의 반열에 들었으니까.
계란이 귀했던 이유가 있었다. 일단 생산량이 부족한데다 보관과 운반이 까다로웠다. 여차하면 깨져 나갔고 위의 ‘계란유골’에서 보듯 오래 보관하기도 어려웠다. 래그 계란 생산은 닭고기 생산업의 부산물 정도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60년대 말 이후 대형 양계장이 생겨나면서 계란은 그 귀한(?) 신분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잡지 <현대양계> 1973년 1월호에 따르면 1971년 1인당 계란 소비량은 90개였는데 1972년에는 102개로 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80년대 이후에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어 1990년에는 167개로 껑충 뛰었고 2000년대에는 200개를 돌파하여 2015년 현재 계란 소비량은 1인당 254개에 이르렀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 이렇게 풍성해진 계란의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현실이 엄연하기도 했다. “농림축산검역본부에 따르면 2014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에서 사육되는 산란계(알 낳는 닭)는 6400만 마리이며 양계장 수는 1200여개에 달한다. 이 닭들이 하루 평균 생산하는 달걀 수는 약 3800만개이다. 그런데 이 중의 1%만이 평지나 방목에서 길러지고 무려 99%가 열악한 닭장에서 길러지고 있다. ‘배터리케이지(Battery Cage)’라고 불리는 닭장은 가로 세로 50㎝의 작은 철창이다.” (주간조선 2379호)
이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들도 다양하다. 목초를 먹인 닭이 낳았다거나 오메가 성분의 계란이라거나 하는 기능성 계란들도 소비자의 선택의 폭을 넓혔고 축산물안전관리인증원에서는 ‘해썹’ 인증을 통해 항생제를 사용하지 않는 안전한 환경에서 생산된 달걀임을 보증하여 소비자들에게 보다 안전하고 영양가 높은 계란이 공급되도록 하고 있다. 계란 한 알이 귀했던 시대를 돌이키면 격세지감을 느낄 일이지만 아무리 흔해졌다 하더라도 계란은 우리 식생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주요한 식재료임에는 변함이 없다. 펄펄 끓는 라면 속에서 노릇노릇 익어가는 계란 노른자만큼 식욕을 돋우는 색감이 어디 있으며 찜질방에서 땀 실컷 흘린 뒤 머리에 부딪쳐 껍질을 깨고 야금야금 까먹는 삶은 계란 같은 별미가 무엇이겠으며 출출할 때 지글지글 프라이로 만들어 소금 알맞게 뿌려 밥 위에 얹은 이상 가는 반찬이 과연 존재하겠는가.
어느 집이든 대개 냉장고 문을 열면 가지런히 놓인 계란들이 보인다. 한때는 무진장 귀한 음식이었고 더 옛날엔 부장품의 신분(?)이기도 했으나 이제는 쌓여 있어도 그다지 손길이 가지 않는 타원의 대열을 찬찬히 뜯어보면 군침도 돌았다가 미소도 지어졌다가 문득 처연해졌다가 하는 여러 상념에 젖어들게 된다. 그만큼 오래 우리 곁에 있었고 사연도 많고 기억도 번다한 우리의 먹거리였으니까.
* 본 칼럼은 수정 없이 게재하며 농림축산식품부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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