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전통적인 음식 문화는 유제품(乳製品)과는 거리가 있었다. 된장, 젓갈 등 발효 음식을 즐겼지만 서양의 치즈나 몽골의 마유주(馬乳酒)처럼 동물의 젖을 발효시켜 먹은 흔적은 보이지 않고, 소나 말, 양의 절대량이 부족하였던 바 젖이 충분하지도 않았다. 암소 한 마리에서 젖을 짜내려면 “새끼를 낳자마자 곡물이 든 죽을 먹인 후 네 발을 묶고 뒤집고 소의 꼭지를 쥐어짠 다음, 유방을 발로 차서” (임원십육지 기록) 얻어야 했으니 소에게나 사람에게나 못할 일이었지 싶다. 그나마 왕실과 지체 높은 부잣집에서는 우유와 쌀을 섞어 끓인 타락죽 등의 호사를 누리기도 했으나 지극히 제한적이었고 일반 국민들에게는 그림의 떡과 같은 음식이었다.
구한말 한국에 들어와 살던 외국인들에게 유제품의 부재는 커다란 애로 사항이었다. “조선 재래종의 소는 숫자도 많지 않고 우유를 짤 수 있게 훈련이 되어 있지도 않다.” (셔우드 홀의 조선 회상, 좋은 씨앗, 2003)는 토로에서 보듯, 서양인들은 우유의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즐기지 않는 조선인들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한국에 현대적인 낙농이 소개된 것은 1902년 농상공부의 기사로 근무하던 프랑스인 쇼트가 홀스타인 종 젖소 스무 마리를 들여와 오늘날 서울의 신촌역 부근에 목장을 차리고서부터였다. 하지만 우유를 한국인들에게 널리 알린 것은 서양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일본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구한말 서양인들의 기록에 비추어도 한국인보다 평균 신장이 훨씬 작았던 일본인들은 머리 두어 개는 더 큰 서양인들을 올려다보며 그들과 나란히 서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였다. 그 결과 서양식 식생활을 적극 도입했고 오랜 세월 육식을 피해 왔던 일본인들은 고기와 유제품을 적극적으로 소비하기 시작했다. 조선에 들어온 일본인들 역시 그랬고 그들을 겨냥한 목장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우유 먹고 키 크자.”라는 익숙한 이야기는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목장들은 일본인들이 밀집해 살던 충무로, 명동, 청량리 인근에 세워졌는데 이들을 통해 점차 우유는 조선인 사회에도 알려지게 됐다. 1914년 무렵이 되면 9개소에서 우유를 생산했고 젖소 두수는 99두, 우유 생산고는 891석 1두 2되 8합에 이르고 있었다. (경성번성기京城繁盛記) 동아일보 1925년 11월 5일 자는 음식물 관련 정보 기사를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몸에 기름기가 없으면 늙어 보이기가 쉬운 것이니 그런 분은 버터와 우유를 먹으면 좋다고 한다.” 요즘 말로 하면 우유는 노안(老顔) 방지 음식인 셈이다. 1930년대 이후 일본의 대규모 낙농 기업들이 대거 진출해서 목장을 세우고 우유를 생산했고 우유의 하얀 빛깔은 점차 조선인들에게 익숙해져 갔다.
조선의 우유가 대량생산 체제를 갖춘 것은 1937년 경성 우유협동조합이 만들어지고서부터였다. 그러나 “아침에 짠 우유가 저녁에 먹으면 반드시 상하던” (동아일보 (1931년 6월 13일 동아일보) 시절 우유는 조선인들에게는 가까이하기 녹녹치 않은 음식이기는 했지만 조선 왕조 이전처럼 왕족들만이 먹는 귀한 음식에서는 벗어나고 있었다. 일례로 조선 총독부에 폭탄을 던졌던 의열단원 김익상의 경우 체포된 후 빵과 우유를 배불리 먹으면서 그 의연함을 과시한 바도 있었고 소설가 이효석 경우 아침마다 축음기로 음악을 들으며 우유를 마셨다고 했다. “특히 겨울에 얼어서 살얼음이 잡힌 것을 끓여서 흡사 풋옥수수 삶은 냄새나는 눅진한 액체를 입안에 그득 머금었을 때, 우유의 진미는 그 한 모금에 있다.”라는 것이 이효석의 주장이었다.
해방이 왔다. 이제 우유는 조선인들에게 건강식품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서울 시내의 오십오개 초등학교 중 영양이 부족한 아동에 한해서 한 사람에게 일 홉씩 배급하게 되는데 하루 배급량은 1천홉에 달한다. 그리고 시 위생과의 계획을 보면 앞으로 단백질 광물질 지방질 칼로리가 풍부한 우유의 생산에 힘써 초등학교 아동 전부에게 될 수 있으면 배급하여 ‘건아 조선’의 이름을 날리리라 한다. 일본 아동에 한해서 배급한 적은 있으나 조선인 아동에게 이 배급은 이번이 처음이다.” (1946년 3월 15일 동아일보)에서 보듯 우유에 대한 기대감은 넘쳐나고 있었거니 마치 ‘쌀밥에 고깃국’같은 선망의 대상으로 등극하기도 했다. 삼균주의로 유명하며 6.25 때 납북된 조소앙 선생은 국회의원 선거 연설에서 이렇게 공약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 조소앙은 여러분께 맹세합니다. 우리 민중 독립을 성공하리다. 아기마다 대학을 졸업하게 하오리다...... 사람마다 우유 한 병씩 먹고, 집 한 채 씩 가지고 살게 하오리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우유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한국인들에게 다가섰다. 전쟁으로 온 국토가 초토화된 상황에서 원조 밀가루와 분유는 기아 선상에 시달리는 한국인들의 생명선이었다. 마치 조선 시대에 기근이 들면 관가에서 죽을 끓여 사람들을 먹였던 것처럼 전쟁 중인 한국 정부도 원조 분유에 곡식 조금 섞어 끓인 죽으로 굶주림을 덜었다. 학교 급식의 시작도 결국은 원조 분유에서 비롯됐다. 1953년, 캐나다 정부가 원조한 14만 파운드의 전지분유를 학생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준 것이 학교 급식의 시작이었다. 국제연합아동기금(UNICEF)과 미국경제협조처(USAID) 등 외국 원조 기관은 옥수수가루나 밀가루, 탈지분유를 원조했다. 교육 당국은 이를 죽이나 빵으로 만들어 학생들에게 배급했다. 이 ‘급식’은 20년 동안이나 지속돼 한국 어린이들의 배를 채워 주었다.
<출처 : pixabay.com>
한국의 우유 산업은 60년대 정부의 적극적인 낙농 장려책에 힘입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기존의 서울우유 협동조합은 물론 남양, 매일, 빙그레 등 유제품 업체가 줄줄이 서서 경쟁 체제를 갖췄고 학생들에 대한 우유 공급도 확대됐다. 아이스크림, 치즈, 요구르트 등 다양한 유제품들이 한국인의 식단을 바꿔 놓았다. 70년대에 들어서면 이미 우유의 과잉 공급에 대한 문제 제기가 등장했던 바, 정부는 업계에 우유 소비 촉진을 위한 가공 우유 생산을 권장했는데 1974년 빙그레는 바나나 우유라는 빅히트 제품을 내놓는다. 지금까지도 생산되고 있는 이 바나나 우유는 시골의 장독을 모티브로 한 ‘뚱뚱한’ 디자인과 부자들이나 맛보는 과일이었던 바나나 맛 (바나나는 들어가지 않았다)으로 빅히트를 쳤다. 손에 그득 들어가는 바나나 우유에 빨대 꽂고 보름달 빵 한 조각 베어 물던 추억을 가진 어른들이 많지만 그 아이들도 편의점에서 삼각 김밥과 함께 이 바나나 우유를 먹고 있으며 바나나 우유는 편의점 판매 품목 랭킹 상위권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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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 음식 문화에서는 이방인 같은 존재였던 우유. 그러나 20세기 현대사의 거친 격랑은 한국인과 우유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묶어 놓았다. “우유를 먹이면 키와 체중과 가슴둘레의 발육이 놀라리만치 달라집니다.”(동아일보 1932년 5월 5일 자)는 믿음으로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우유를 먹였고 서양 식생활에 익숙해진 이들은 소설가 이효석처럼 ‘목장에서 갓 짠’ 우유를 음미하며 인생을 즐기기도 했다. 전쟁과 기아의 소용돌이에서 가루 분유는 수십만의 목숨을 살렸고 다양한 형태로 우리의 식문화의 한 부분을 굳건히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들어 공급의 과잉과 소비의 감소로 낙농가들이나 우유업체들이 울상을 짓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꼭 그분들을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우리 현대사와 함께 했고 우리 역사의 한 세대를 굶주림에서 건져 올렸던 우유 한 잔쯤 고마운 마음으로 쭈욱 들이킬 수 있을 것 같다.
* 본 칼럼은 수정 없이 게재하며 농림축산식품부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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