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재배되고 생산되는 작물은 무엇일까? 아시아 수십 억 인구의 주식인 쌀? 빵과 국수를 만드는 재료이며 쌀만큼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주식으로 하는 밀? 그러나 대답은 옥수수다. FAO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는 2016년 생산 예상량으로 밀 7억2천3백만 톤, 쌀 4억 9천 5백만 톤으로 잡고 있는 반면 옥수수 생산량은 무려 10억 1천4백만 톤으로 내다보았다. 즉 옥수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상 최대의 작물인 셈이다.
하지만 인류의 태반은 오랫동안 옥수수를 몰랐다. 옥수수의 원산지인 아메리카 대륙의 잉카와 마야 아즈텍 등의 문명은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높고 (10ha당 630킬로그램) 다양한 형태로 조리 가능한 옥수수를 주식으로 삼았다. 아메리카 사람들에게 옥수수는 ‘신의 선물’이었다. 마야인들은 옥수수를 신이 죽어 환생한 거룩한 작물로 믿었고 옥수수 가루에 자신의 피를 섞어 사람을 만들었다고 기록해 놓았다. 처음에는 낟알 몇 개 달린 볼품없던 열매였던 옥수수는 아메리카 대륙 사람들의 끊임없는 연구와 교배를 통해 오늘날의 옥수수와 비슷한 모습으로 진화해 왔다.
<EBS 다큐프라임 불멸의 마야 1부-옥수수 문명을 찾아서 캡쳐화면>
그러나 무엇이든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이다. 옥수수는 풍성한 생산의 장점과 아울러 지력 손상이 어마어마하다는 단점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개간을 해야 했고 그것도 한계에 도달하면 옥수수에 지탱하고 있던 문명이 무너지기도 했다. 마야 문명의 급작스런 쇠퇴와 소멸의 원인 중의 하나로 옥수수가 지목되는 이유다. 북미 인디언들의 경우 콩과 호박을 함께 재배하면 지력 쇠퇴를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마야 문명은 그 방법을 알았다 하더라도 급격한 인구 증가와 토지의 황폐화를 저지하기 어려웠던 듯하다.
신대륙의 발견 이후 옥수수는 구대륙으로도 전해졌다.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북아메리카에 상륙한 일단의 청교도들이 인디언으로부터 옥수수 재배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오늘날 미국의 ‘선조’(先祖)들은 모두 굶어죽었을 것이다. 또한 옥수수는 그 강력한 생산력으로 유럽에서도 각광받았다. 유럽에서 빵의 대량생산은 옥수수의 도입 이후에야 이루어졌다고 한다. 밀가루로 빵을 만들긴 했으나 밀 자체가 보통 사람들의 주식으로 도입되기엔 생산량이 빈약했기에 옥수수는 훌륭한 대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온 몸의 피부가 거칠게 변하고 염증과 내장 통증이 발생하며 신경 질환이 생겨 환각 상태에 빠지거나 기어코 죽음에 이르기도 하는 그때껏 유럽에서 본 적이 없던 병이었다. 의사들은 이 병을 펠라그라라 부르며 나병의 일종으로 진단했는데 그 비밀은 200년 뒤에야 밝혀진다. 1914년 의사 골드버그는 고아원이나 구빈원 등에서 흔히 발생하는 펠라그라가 의사나 간호사들에게는 일절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했고 펠라그라 병이 전염되는 것이 아니라 동물성 단백질인 나이아신 부족으로 생기는 병임을 발견한 것이다. 옥수수빵과 옥수수죽은 가난한 이들에게 상시적으로 돌아가던 급식이었고 옥수수에는 신경세포에 필요한 필수아미노산의 일종인 나이아신이 결핍되어 있었던 바, 펠라그라는 옥수수를 다량으로 섭취하는 이들을 공격했던 일종의 ‘가난병’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옥수수를 주식으로 했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펠라그라 병에 걸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아즈텍과 마야인들은 옥수수를 석회수에 불려 나이아신을 화학적으로 생성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렇게 갈아만든 반죽으로 음식을 만들었다. 이 방법을 모르고 옥수수만 잔뜩 거둬갔던 백인들은 수백 년간 펠라그라 병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위키백과 경세유표>
유럽에 상륙한 옥수수는 점차 다른 지역으로도 전파됐다. 16세기 초에 이르면 인도와 중국에도 옥수수가 들어왔고 18세기쯤이면 조선에도 옥수수가 흘러들어왔다. 옥수수의 경상도 사투리가 ‘강냉이’인 것은 주지의 사실인 바, 이 강냉이의 어원은 ‘강남(江南)이’다. 서울 강남이 아니라 양쯔강 남쪽을 뜻하는 강남, 즉 중국에서 온 곡식이라는 뜻이었다. 이익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숙종 때 발간된 중국어 통역서인 ‘역어유해(譯語類解)’에 옥수수에 관한 설명이 있다고 기록해 두었다. 여기에 따르면 “옥촉(玉촉)이라는 것이 있는데 잎 사이에 뿔처럼 생긴 꾸러미가 달렸고 속에는 구슬 같은 열매가 있어 맛이 달고 먹음직스럽지만 곡식 종류는 아니라고 했다.” (윤덕노의 음식이야기 66, 동아일보 2011.8.9) 또 정약용은 ‘경세유표(經世遺表)’에 열일곱 가지의 곡식을 좋은 것대로 순서를 정하면서 옥수수는 열여섯 번째로 꼽았다고 한다. (같은 기사) 이렇게 두고 보면 우리 조상들은 옥수수를 신의 선물로 찬미했던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펠라그라 병에 걸릴 정도로 옥수수에 탐닉했던 유럽인들과 달리, 옥수수를 그렇게 즐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산간 지방의 가난한 농민들에게나 극심한 흉년이 들었을 때 옥수수는 사람의 목숨을 여럿 살렸던 구황작물이었다. 1928년 1월 9일 동아일보에 실린 슬픈 이야기는 옥수수에 전 가족의 목숨을 걸었던 비극을 전해 준다.
경상도 울산 출신의 천재곤이라는 이는 늙은 부모와 처자 등 아홉 명의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이주하여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지주들의 횡포와 중국 관헌들의 탐학으로 가진 것 다 빼앗기고 굶어죽을 지경에 처하자 “돈 벌어오겠다”며 열흘의 기한을 두고 도회지로 떠난다. 옥수수 다섯 말을 빌려 가족들에게 두고 떠났으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는지 보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들의 울부짖음을 보다 못한 아내는 이웃 마을로 구걸을 가고 옥수수 몇 되를 얻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불어 닥친 눈보라 속에서 아내는 젖먹이 딸을 업고 옥수수 됫박을 머리에 인 채 쓰러져 동사하고 말았다. 옥수수를 목놓아 기다리던 노부모와 아이들도 슬프게 굶어죽었고 발버둥 치며 번 돈을 가지고 돌아온 천재곤은 그 참상에 그만 칼로 목을 찔러 자살하고 말았다.
백석의 시 ‘여승’(女僧)에도 옥수수에 얽힌 슬픈 사연이 등장한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 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즉 백석이 만난 옥수수 행상 여인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옥수수를 팔아 아이를 기르다가 아이가 죽어 버린 후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됐던 것이다. 그렇듯 옥수수는 우리에게 풍요로운 알곡으로보다는 슬픔 서린 알알로 남았던 역사가 더 길다. 가까이로는 북한의 90년대 대기근 역시 옥수수에서 비롯된 바 있다. 북한은 쌀과 맞먹는 주곡으로 옥수수를 재배했는데 동구권 몰락 이후 비료와 석유 지원이 끊기면서 소모된 지력(地力)을 회복시킬 수단을 상실했고 급기야 수십만이 굶어죽는 대참변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대기근이 온다, 우승엽 저, 처음북스)
<농식품부 블로그>
2016년 4월 21일자 아시아투데이 기사에 따르면 국내 옥수수 자급률을 전년도에 비해 0.1퍼센트 하락한 4.1퍼센트다. 무더운 여름 두 손에 감아쥐고 알알을 훑어 잘근잘근 씹는 맛있는 간식 옥수수의 태반은 해외산인 셈이다. 하지만 우리 나라 옥수수 최대 산지인 강원도 홍천 등 곳곳에서 노랗게 익어가는 옥수수의 맛은 단연코 수입산을 압도하며 ‘국산 옥수수’는 옥수수수염차나 사료, 팝콘 등 2차 가공품에 있어서 경쟁력 있는 품목으로 떠오르고 있으며 ‘대학찰옥수수’는 충북 괴산의 특산품으로 대우받고 있기도 하다.
무더운 여름이 오면 많은 이들이 가족들끼리 둘러앉아 옥수수를 훑으며 웃고 떠들 것이고 아이들은 옥수숫대로 하모니카를 불 것이다. 어릴 적 불렀던 <옥수수 하모니카> 기억하시는지? 그 노래의 역사도 길다. 1929년 홍난파가 작곡한 노래이니까. 그런데 이 노래에도 사연이 있다. 원래 이 노래의 작사자는 윤복진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월북했고 한동안 이 노래는 금지곡이었다. 그런데 홍난파 기념사업회에서 동요 작가 윤석중 선생에게 부탁하여 가사를 조금 바꿔 다시 만들었고 1964년 해금돼 아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교과서에도 실렸던 것이다. 한 번 불러 보면서 아삭아삭 훑어가며 먹는 옥수수 맛을 떠올려 보자. “우리 아기 불고 노는 하모니카는 옥수수를 가지고서 만들었어요. 옥수수알 길게 두줄 남겨 가지고 우리 아기 하모니카 불고 있어요.”
* 본 칼럼은 수정 없이 게재하며 농림축산식품부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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