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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농업 자료(~2021)/[농업 정책] 기사

시대의 소울푸드 4. "영조의 닭곰탕부터 아빠의 통닭까지"

by 청년농사꾼 2016. 7. 7.




아득한 옛날, 늑대 가운데 어느 종은 힘들여 사냥하느니 인간들의 곁에서 음식을 받아먹고 인간의 손에 길들여지는 쪽을 택하게 된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 개의 조상이었고 동시에 ‘가축’이라는 존재의 계보를 연다. 이후 소나 돼지가 가축의 대열에 합류했고 약 4천년쯤 전 오늘날의 동남아시아 지역을 시작으로 야생 닭 역시 사람들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에 닭은 식용보다는 시간을 알려주는 영물로 대접받았고 귀족들이 즐기는 싸움닭 등으로 길러졌다.  공자가 서른다섯 살 때 고향인 노나라를 떠나게 만든 사건은 바로 귀족들의 닭싸움, 즉 투계 중 발생한 시비가 발단이 돼 터진 내전이었다.





기원전 4세기에 이르면 이미 중국에서는 계란을 대규모로 부화할 수 있는 시설이 개발됐고 닭은 고기와 알을 인간에게 선사하는 훌륭한 가축이 돼 있었다. 우리가 즐겨 보는 삼국지에도 당시 중국인들이 닭을 즐겨 먹었음을 전하는 내용이 여럿 나온다. “버리기는 아까우나 먹을 것도 없는” 닭갈비 계륵(鷄肋)의 이야기가 그렇고 “어찌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랴?” 하는 말에서 보듯 닭 잡는 데 쓰는 칼이 따로 있지 않았던가.


우리 조상들이 닭을 키우기 시작한 건 대략 2천년 정도로 생각되는데 고구려 벽화에는 꼬리가 긴 닭의 모습과 역시 투계(鬪鷄) 모습으로 추정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신라 또한 그 별칭을 ‘계림’(鷄林)이라 할 만큼 닭과 관련된 신화를 지닌 나라였다. 광개토대왕이 군대를 보내 신라를 도운 이후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같이 지냈는데 눌지왕 때 신라 주둔 고구려군을 몰살시키고 정치적 독립을 달성했다. 이때 눌지왕이 내린 명령은 “신라 사람들이여, 집에서 기르는 수탉들을 죽여라.”였다. 수탉이란 닭의 깃털을 모자에 즐겨 꽂고 다녔고 태양 속 삼족오를 상징으로 썼던 고구려인들을 일컬었던 것이다.



<9회 농촌경관 사진 공모전 대상 수상작 이진환씨의 시골의 정취’>

 


고려 시대 궁중에서는 잡귀를 몰아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행사에서 닭을 제물로 사용했다. 그러나 고려는 불교의 나라였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도경>에서 고려 사람들의 서툰 도축 솜씨를 비웃듯 소나 돼지, 닭을 식용으로 일상화하는 것에는 거리낌이 많았다. “만물이 발육 생장할 때가 되면 새끼 치고 알 낳는 짐승을 죽이지 말라는 것은 예기에 명시되어 있는 법전이며 옛날 어진 임금들의 좋은 정책이었다. 그런데 지금 각 도 수령은 법령을 잘 준수하는 자가 드물다.”(고려 숙종- <몽고가 고려 육류 식용에 미친 영향>-유애령)는 경고나 “나는 인자한 마음을 새와 짐승들에게까지 미칠 것을 바라는 바이다”(고려 원종- 위 논문)는 포고에서 보듯, 고려인들은 육식을 즐기지 않았던 (또는 그렇게 유도됐던) 것이다. 그래도 왕실에서는 초계탕 (여기서 ‘계’는 닭이 아니라 겨자를 뜻함)을 만들어 먹었다고 하고 일반인들도 백숙을 만들어 먹었다고 하지만 닭은 고기보다는 계란을 얻기 위한 존재로 더 소중했다. ‘씨암탉’은 그래서 소중했던 것이다.


선 시대에 들어와도 닭고기를 마음 놓고 먹었던 역사는 그다지 길지 않다. 오히려 식재료로는 ‘꿩 대신 닭’이 아니라 ‘닭 대신 꿩’이 더 많이 쓰였다. “1670년(현종 11년)쯤 안동 장씨가 쓴 <음식디미방>에는 주로 꿩고기를 이용한 음식이 여럿 등장한다. 원래 17세기까지만 해도 음식의 재료로는 닭보다 꿩을 더 높게 여겼다. 꿩도 알을 낳지만 그것이 계란에 버금가지는 못했다. 겨울에 매로 사냥을 해서 잡는 꿩이 없던 여름이 되어야 꿩 대신 닭으로 고기를 삼았다. 그런 사정이 앞의 <동국세시기> 음력 6월편에 담겨 있다.” (주영하, 2011년 4월 19일 <주영하의 음식 100년- 보양의 상징 삼계탕> 중)


<증보산림경제칠향계 *출처-한국전통지식포탈



조선 시대에 주로 만들어 먹었던 닭 요리는 일종의 찜 종류였다. <증보산림경제>에는 삶은 닭 안에 표고, 파, 생강, 도라지, 후추, 천초, 청장 등 일곱 가지 재료를 넣고 쪄낸 ‘칠향계’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이것이 닭고기 가운데 가장 맛있는 조리법이라 자처하기도 했다. 닭곰탕 또한 허한 몸을 채우기 위해 즐겨 만들어진 요리였다. 영조 임금은 후일 정조가 되는 세손의 몸이 약하다는 소식에 닭곰탕을 하사했고 꼬박꼬박 들이켰는지 확인까지 하는 알뜰한 배려를 하기도 했다. 이몽룡이 어사출두 직전 변학도의 잔칫상에서 가져다 먹은 것은 소갈비와 더불어 닭갈비였으니 조선 후기에 이르면 닭고기를 먹는 방식도 웬만큼 다양해진 셈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본격적으로 그리고 대규모로 닭고기에 입문(?)한 것은 역시 20세기에 들어서였다. 1920년대 이후 조선총독부는 전국 농가에 닭을 칠 것을 권장했고 질 좋은 계란을 생산하도록 종계(種鷄)를 보급했다. 1925년 10월 4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이미 그 해에 전국적으로 천만 마리나 되는 닭을 잡았다고 한다. (주영하, 식탁 위의 한국사 중) 당시 식민지 조선 인구 2천만이었으니 한 사람에 반 마리도 돌아가지 않을 양이었으나 조선 시대에 비하면 엄청나게 늘어난 수치였다.


해방 이후에도 닭의 사육 두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사료 값이 올라가면서 계란의 수익률이 떨어졌다. 이에 양계업자들은 계란보다 닭고기 판매 쪽으로 눈을 돌렸고 또 알을 낳는 용도보다는 식용으로 유용했던 백세미 (White semi Broiler) 도입을 통한 품종 개량이 이뤄지면서 닭고기 소비 역시 대폭적으로 증가했다. 이는 한국인의 음식 문화에 일대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통닭집이 곳곳에 생겨났고 조선 시대와 일제 강점기 소수 부유층만이 향유하던 닭과 인삼의 결합인 삼계탕이 본격적으로 한국인들의 식사 메뉴에 오르기 시작했다. 소풍을 갈 때 선생님들 대접용으로 반드시 ‘전기구이 통닭’이 동원됐고 퇴근길 아버지들이 통닭 봉지를 들고 집에 들어오면 개선장군처럼 환영을 받았다. 당시 통닭집의 별칭은 ‘영양 센터’였다. 영양가 보충으로 그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을까.



출처-나무위키



 “치킨 성장률 자체는 둔화됐지만 국민 1인당 소비량은 계속 늘고 있어 창업자들 사이에서도 타업종 대비 유행을 덜 타고 투자비가 적게 드는 업종으로 인기” (이경희 한국 창업전략 연구소장)라는 분석을 보면 ‘치느님’의 권위는 앞으로도 여전히 높아갈 것 같다. 이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대형 육계회사들만 덩치를 불리고 하루 열다섯 시간 노동을 마다않는 치킨집 주인들과 1킬로그램에 고작 900원을 받으며 닭을 길러내는 양계업 종사자들의 한숨이 늘어나는 것은 해결해야 될 문제겠지만.





통계청 통계에 따르면 2016년 1/4분기 현재 산란계는 7017만7000마리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130만 마리(1.9%) 증가했고 육계(8654만1000마리)는 가격 하락에도 종계사육 마릿수와 병아리생산이 늘면서 전년 동기 대비 4.6% 증가했다. 도합 1억 5천만 마리의 닭이 우리를 위해 알을 낳고 ‘영양’을 위해 길러지고 있고 수억 마리가 우리들의 식탁을 채우고 있다. 오늘도 퇴근길에 지나는 호프집에서는 분주히 닭들이 튀겨지고 있고 고깃집에서는 계란찜이 지글지글 익는다. 춘천에 가면 닭갈비 냄새가 도시에 가득하고 한강변에는 닭볶음탕 내음이 후각 세포를 자극하며 도심의 유서 깊은 삼계탕집에는 사시사철 긴 줄이 늘어선다. 가히 ‘치킨 공화국’이라 할 만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닭고기 1인당 소비량은 미국이나 캐나다의 1/3이나 1/4에 그치고 있으니 가히 ‘치느님’의 은혜는 그야말로 글로벌하다 하겠다.




* 본 칼럼은 수정 없이 게재하며 농림축산식품부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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